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밀 뒤르켐 (문단 편집) == 생애 ==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 제국]] 북동부 [[로렌]] 레지옹(현 [[그랑테스트]] 레지옹) 보주 데파르트망의 에피날(Épinal)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모이즈 뒤르켐(Moïse Durkheim)은 [[유대교]] [[랍비]]였으며 가풍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랍비가 되고자 공부하였으나 10대에는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이후로도 [[종교]]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으나 철저하게 무신론자로 변한 그에게 종교는 하나의 연구거리에 불과했다. 실제로 그의 주저인 『자살론』에서도 주된 논의는 자살에 미치는 사회적 요인 중 종교가 갖는 중요성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천주교]]와 [[개신교]]를 같은 기독교로 묶지 않고 그 문화에 따라 상세히 구분한 것은 그가 종교를 절대적인 독트린을 가진 신앙체계로 본 대신 하나의 연구대상(그의 표현에 따르면 사회적 사실·fait social)로 보았다는 점을 방증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기저작이자 연구자들에 따라서는 최고의 저작으로 불리는 저서가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라는 점에서, 뒤르켐에게 종교, 나아가 인간의 '믿음'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테마였는지 알 수 있다. 뒤르켐이 한창 공부를 하던 시기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온갖 사회 불안 요소가 팽배하던 시기였다. 그 역시 혼란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회적 안정을 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콩트가 제시한 사회학이라는 비전이었다. 그의 박사논문이자 주 저서로 알려진 『사회분업론』은 기존의 사회주의가 노동자들을 '소외'시킨다며 경원시한 '분업'제도가 사실상 근대사회의 새로운 연대라는 주장을 제시하는데, 이는 사회학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한 포석이기도 한 만큼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일에 매진하면서도 '사회적 안정·질서'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논증한 분석이다. 또한 그 유명한 [[아노미]] 개념도 이미 이때 마련되었다. 보르도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교수직을 시작한 그는 결국 [[파리 제4대학교|소르본 대학교]]의 교수로 취직했으며 여기서 '사회학과'에 최초로 재직하게 된다. 사실상 사회학을 고등교육에서 다루는 한 학문으로 정립한 셈이다. 소르본대 사회학과 교수가 된 뒤 사회학이라는 학제를 강화시키기 위해 '사회학 연보'를 창간하여 『증여론』으로 유명한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뒤르켐의 수제자) 등과 함께 프랑스 지성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지금까지 유지되는 프랑스 교육제도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게다가 뒤르켐은 1913년 프랑스 사회학회 초대 회장직을 역임함에 따라서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존재를 더욱 튼튼하게 굳히게 된다. 본래 모든 학문이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그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이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비판할 수 있는 학회가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하지만 정작 뒤르켐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7년 사망하는데, 그가 지극히 사랑했던 아들을 비롯하여 『연보』의 주요 작성자들, 곧 뒤르켐 학파라 불릴 만 한 인재들을 한꺼번에 잃은 충격이 컸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